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루아 왕조 (문단 편집) == 의의 == 군사적으로는 백년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위그노 전쟁을 근거로 '어째 대대로 잘 풀리는 일이 별로 없었던 왕조' 라고 평가절하당할 때도 있다. 하기야 백년전쟁에서는 프랑스 대부분이 초토화되었고, 이탈리아 전쟁에서도 신나게 박살이 났고, 마지막엔 위그노 전쟁까지 겪었으니... 문화적으로는 큰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일단 백년전쟁 시대에는 [[샤를 5세]]라는 명군이 출현하여 건축과 문학을 진흥시켰고, 자기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등 합스부르크 황조에게 신나게 털린 [[프랑수아 1세]]도 르네상스 문화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발전시켜 언어, 문학, 학문, 건축, 예술 등등[* 며느리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메디치]]가의 요리를 들여와 프랑스 궁정 요리가 다채로워지기도 했다.] 손을 안 댄 분야가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내정 면에서는 '프랑스의 세종대왕' 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러한 문화적 발전은 이후 [[부르봉 왕조]] 시대에도 이어져, 베르사유를 중심으로 프랑스라고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궁정 문화의 기틀을 이루었다. 또한 발루아 왕조 시대에 프랑스가 중세 봉건왕국에서 근세적인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도 중요한 업적이다. 일단 샤를 5세가 프랑스 최초로 정기적인 조세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관료제를 정비하고,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상비군을 갖춤으로서 밑그림을 그려놓았고, 백년전쟁 이후에 즉위한 루이 11세가 중앙집권을 완성했다. 그는 백년전쟁으로 많은 봉건 귀족들이 죽거나 영지가 황폐해졌다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의도적으로 대귀족들을 억압하면서 중소귀족들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결국 부르고뉴 공작 샤를을 중심으로 대귀족들이 '공익동맹' 을 결성하고 루이 11세에게 맞섰으나 진압되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는 루이 11세가 '짐이 곧 프랑스다!' 라고 선언했을 정도로 강력한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이러한 중앙집권체제는 서유럽에서는 가장 빠른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외교도 중요 포인트. 이는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 중에, '우리 프랑스 혼자서도 안 되고([[이탈리아 전쟁 #s-2.1.4|4차 이탈리아 전쟁]]),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모조리 긁어모아도 안되잖아([[이탈리아 전쟁 #s-2.1.5|5차 이탈리아 전쟁]])?! 그렇다면...' 이라는 발상으로 동맹을 제안한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이슬람 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정작 당시에는 '[[임페리우스|신성모독이다!]]' 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이후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왕조가 발루아에서 부르봉으로 바뀐 1620년에도 프랑스의 대외 무역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나라가 오스만 제국이었다. 또 의복이나 음식 등 오스만 제국의 문화가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전체에서 [[튀르크리|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할 때까지,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의 동맹은 간간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보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